인종 조선시대 최고의 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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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의 어린시절

인종(1515~1545)은 조선 제 12대 왕으로 중종과 장경왕후 윤씨의 소생이며 형제로는 누나인 효혜공주가 있습니다. 3살 때부터 책을 읽었을 정도로 총명하고 모든 면에서 뛰어났습니다. 하지만 며칠 만에 생모 장경왕후 윤씨는 산후병으로 사망하며 세자 시절부터 고초를 겪게 됩니다. 아무리 세자라 하더라도 버팀목이 없으면 몰락하게 되는 것이 왕실의 생리 현상 아닐까 싶습니다.

아버지인 중종은 반정으로 왕에 올랐기 때문에 공신들의 힘이 큰 상황이었고 늘 공신들의 눈치를 봐야 했습니다. 어린 세자를 보호하기 위해 같은 파평 윤씨 가문의 왕비를 책봉하게 되는데 바로 문정왕후 윤씨입니다. 한 때 조선을 쥐락 펴락한 여장부로 꼽히는 인물이지요.

문정왕후에게 돌아 가신 장경왕후는 9촌 삼종 고모이며 장경왕후, 문정왕후 둘 다 세조비 정희왕후 형제들의 자손입니다. 문정왕후는 세자를 보호해야 된다는 명목으로 왕비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나 늘 반정 공신들에 의해 들어온 후궁들에게 권력이 밀렸습니다. 공신들의 자신의 딸을 중종의 후궁으로 앉혀 놓았는데 8명의 후궁 중 가장 권력이 쎈 후궁이 경빈 박씨, 희빈 홍씨, 창빈 안씨였습니다.

경빈 박씨는 뛰어난 미모에 정치 감각 또한 남달랐으며 중종의 장자인 복성군을 낳았고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남곤, 심정 등 권신을 끌어 모아 자신의 세력을 만들었습니다. 역사를 보면 늘 칼 없는 전투같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발이나 제대로 뻗고 잤을지 모르겠어요.

그 다음은 왕세자 세력인데요. 세자의 외숙부 윤임과 효혜공주의 시아버지 김안로가 세력을 형성했고 문정왕후 세력으로는 오라버니인 윤원로, 윤원형 형제를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합니다.

3대 세력이 형성되어 각축을 다투었는데 이 중 문정왕후의 세력이 가장 약하였습니다. 문정왕후가 정말 대단한 것이 궁중에 자신의 세력을 심고 아들을 낳을 때 까지 장장 17년의 세월이 걸렸는데 그 사이 온갖 수모와 굴욕을 참고 견뎌 낸 대단한 여성이라는 것입니다.

문정왕후는 1534년에 17세의 나이로 입궁하여 딸만 낳고 모진 세월을 겪다가 34세의 나이로 아들 경원대군을 출산하게 됩니다. 아들을 낳기 전까지는 필요에 의해 세자를 감쌌으나 경원대군을 낳은 후 인종을 견제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앉히려는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지요.

경빈 박씨의 몰락

세자를 보호해야 된다는 명분으로 권세를 잡은 김안로의 세상이 왔습니다. 최고의 권력을 자랑하는 김안로는 경빈 박씨를 축출하려고 계획을 세웁니다. 이 때 김안로를 문정왕후도 지원하게 됩니다. 서로 적일지라도 공공의 적인 경빈 박씨를 처단하기 위해서였죠. 인종을 저주한다는 작서의 변으로 경빈 박씨는 몰락하게 됩니다.

김안로의 몰락

윤임, 김안로와 갈등이 극에 달하며 1537년 눈의 가시이던 문정왕후 폐위시키려 합니다. 도를 넘은 행동에 중종이 등을 돌리게 되며 최고의 권력을 누리던 정점에 유배되어 사사되고 맙니다. 김안로가 몰락하면서 조정의 권력은 윤임과 문정왕후 형제 윤원형이 잡습니다. 파평 윤씨 집안끼리의 싸움이 되어버렸지요. 대윤(윤임), 소윤(윤원형)의 갈등이 시작됩니다.

인종 화재 사고

그러던 어느날 세자궁에 의문의 화재가 나게 됩니다.

야사에 의하면 이 때 불이 나자 인종은 “어머니가 나의 죽음을 원하시니 따르는 것이 효가 아니겠는가” 라며 자리에 앉아 죽기를 기다렸는데 중종이 나타나 세자를 부르자 “이대로 죽으면 어머니에겐 효자이나 아버지에겐 불효겠구나” 라고 깨닫고 밖으로 나왔다고 합니다. 문정왕후가 세자를 죽이려고 벌인 짓이라는 소문이 들렸습니다. 진실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문정왕후가 계모였기 때문에 이런 소문도 나는 것이 아닐까요?

왕위에 오른 인종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은 드디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인자하고 학문을 좋아하는 성격이며 유학에 바탕을 둔 정치를 펼치려 노력합니다. 기묘사화 때 죽은 조광조를 신원하고 현량과를 부활시키는 등 중종 때 좌절된 도학정치를 재현하려 노력했습니다. 인종은 몸이 약했고 문정왕후의 도를 넘는 압박에 마음 고생이 심했다고 합니다. 야사에는 “우리 모자를 언제 죽일거냐 죽일거면 지금 죽여라” 라며 자주 포악을 부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인종은 의붓어머니 문정왕후를 극진히 우대했고 나이 차가 많이나는 경원대군과도 친밀하게 지냈습니다.

인종의 죽음

왜 착한 사람은 일찍 죽을까요? 보위에 오른지 8개월만에 후사없이 죽고 맙니다. 인종이 죽은 후 독살설이 나돌기도 했지요. 인종에게 포악스럽게 굴던 문정왕후가 친절한 모습으로 떡을 권했는데 떡을 먹은 인종이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과연 떡으로 독살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인종은 중종이 병에 걸렸을 때 침식을 거르며 간호에 몰두했고 즉위 후에도 삼년상을 치르며 5개월 동안 음식을 제대로 먹지 않은 채 제사와 사신 접대등의 일정을 강행하였기 때문에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인종 1년 6월 25일 인종은 이질이 시작되며 증세가 급격히 나빠졌습니다. 시름 시름 앓다가 7월 1일 3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독살설을 배제 하더라도 문정왕후의 압박이 건강을 해쳤을수도 있습니다. 효성스럽고 인자한 인물이었으며 문정왕후의 압박에 매우 민감하게 스트레스를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문정왕후의 호통이 늘 자신의 불효 때문이라며 자책하여 건강을 악화시켰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인종실록에 따르면 조정과 민간에서 세상을 잘 다스리는 정치를 기대하였는데 국상기간에 부왕의 죽음을 슬퍼한 탓으로 갑자기 승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종의 능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효릉이며 서삼릉을 구성하는 왕릉 가운데 하나로 사적 제 200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왕비 인성왕후와 나란히 쌍릉을 이루고 있으며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일반에 비공개되어 있습니다.

인종이 죽고 문정왕후의 아들 경원대군은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앉게 됩니다. 문정왕후는 대왕대비로 8년간 수렴청정을 하며 죽기 전까지 조선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게 됩니다. 윤임, 김안로와 세력 다툼을 하였고 수없는 좌절을 하였지만 결국 최종 승자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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