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후 청나라 멸망의 씨앗

서태후는 1835년 청나라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가난하였고 고생을 많이 하며 성장했습니다. 삶이 나아지지 않자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궁녀가 되어 16세에 입궁하였습니다.

영특하고 욕심이 많아 궁녀의 신분이 아닌 후궁이 되어 출세하고자 하였습니다. 이 때 청나라 황제는 함풍제였는데 함풍제의 이상형은 노래를 잘 하는 여자였습니다. 이런 정보를 입수한 서태후는 기회를 엿보았고 외모가 미인은 아니었지만 노래 하나로 함풍제의 마음에 들게 됩니다.

황제는 서태후와 동침하였고 왕비와 후궁에게서 자식이 없어 후계자도 없던 황제에게 서태후는 아들을 낳아 주었습니다. 여러모로 천운이 따르는 여자였던 것은 확실합니다.

궁녀에서 후궁이 되고 아들까지 낳았으니 함풍제는 매우 기뻐하여 태후의 자리에 앉힙니다. 함풍제의 정실부인이 자금성 동쪽에 기거하고 있어 동태후라 불렀고 서태후는 서쪽에 기거하여 서태후라 불린 것입니다.

서태후는 야망이 너무 높고 권력욕이 강해 자식 생각보다는 자신의 권력생각에 치중했습니다. 서태후의 아들 동치제 조차 친어머니인 서태후는 매우 무서워 하였고 온순하고 자애로운 동태후를 더 잘 따랐습니다.

동아시아 강국이었던 청나라는 두 번의 아편전쟁을 치른 뒤 황실 전체가 피난을 가고 여러 불평등 조약에 배상금까지 물게 되어 스트레스로 함풍제는 31세의 나이에 요절하고 맙니다. 서태후의 권력욕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함풍제는 여차하면 서태후를 죽이라는 유언장까지 동태후에게 건내고 죽습니다. 함풍제가 죽고 서태후의 아들 동치제가 청나라의 10대 황제로 6세의 나이에 즉위합니다.

어린 아들 대신에 서태후가 나라를 실질적으로 다스리게 되면서 점점 동태후가 거슬리게 되지요. 그도 그럴것이 황제가 동태후만 따랐으며 황제의 혼인에 동태후, 서태후가 각자 자신의 집안 사람을 신부로 추천했는데 황제가 동태후 집안의 신부를 선택하고 서태후의 집안 여인은 후궁으로 앉히면서 서태후가 이를 갈게 됩니다. 그러나 동태후가 서열이 높았고 유언장이 있었기 때문에 서태후는 눈치만 봐야 했지요.

어느날 동태후가 몸이 아파 눕게 되었는데 서태후는 친히 간호를 하며 동태후를 보살폈습니다. 다 나을 때 쯤 팔에 붕대를 두르고 나타나자 동태후가 그것이 무어냐 묻자 점쟁이가 약에 사람의 피를 타서 먹이면 동태후가 다 낫는다고 해서 자신의 팔을 째 피를 넣었다고 하지요.

눈물로 진심 걱정하는 척 하니 감동받은 동태후는 서태후를 믿기로 하고 함풍제의 유언장을 태워버리게 됩니다. 얼마 후 동태후는 계단을 내려가다가 굴러 뇌진탕으로 죽게 됩니다. 서태후의 독살설도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눈의 가시가 사라진 서태후는 권력욕에 더욱 더 눈이 멀어 눈에 뵈는게 없어집니다.

서태후의 아들 동치제는 결국 18세에 스트레스를 받다가 천연두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사에서는 어머니 등살에 못이겨 환락에 빠져 살다 매독으로 죽었다고도 합니다. 홀로 남게 된 임신중인 며느리를 못살게 굽니다. 며느리가 아들을 낳게 되면 자신의 위치가 흔들릴 것으로 생각하고 끊임없이 며느리를 핍박, 결국 며느리는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자신의 아들인 황제가 아파도 걱정은 커녕 다른 황제를 찾아 나섰죠. 자신이 계속 권력을 휘두룰 수 있는 허수아비 황제를 말이에요. 결국 3살짜리 조카 광서제를 황제로 앉히고 섭정을 이어나가게 된 서태후는 사치와 향락에 모든 것을 쏟아 붓습니다. 한 끼에 120개의 반찬을 차려 하루 4끼나 먹었습니다.

보석과 사치품은 물론이고 3000상자가 넘는 옷상자를 보유했습니다. 사치의 끝판왕은 바로 개인 별장 이화원인데요. 어마 무시한 호화별장으로 매일밤 미소년을 데리고 와 유흥을 즐겼습니다.

50대였던 서태후는 그렇게 잘생긴 남자들과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죽였습니다. 서태후와 관계를 맺은 사실이 밖으로 새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지요. 또 늘 젊고 아름다워지려고 산모의 모유를 먹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광서제가 직접 정사를 돌볼 성인이 되었습니다. 막나가는 서태후를 벗어나기 위해 노력을 했습니다. 늘 서태후가 무서워 벌벌 떨면서 성장하게 된 광서제. 서태후는 늘 광서제를 감시, 교육하였습니다. 광서제의 왕비로 자신의 또 다른 조카를 앉혔지요.

광서제가 성인이 되어 섭정을 하면서 서태후는 잠시 뒤로 물러났습니다. 뒤로 물러나 있는 동안에 이화원에서 사치와 향락을 일삼았습니다. 실질적인 권력은 서태후가 가지고 있었지요.

광서제는 서태후와 서태후의 배후 세력인 보수파를 몰아내기 위해 청나라 군부세력인 위안스카이에게 은밀한 제안을 하게 되는데 위안스카이는 그 길로 서태후에게 다 일러 바칩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서태후는 자신의 세력 보수파와 반란을 일으킵니다.

개혁파를 처단하고 광서제를 유폐시킵니다. 다시 청나라는 서태후 세상이 됩니다. 서양열강에 반대하던 의화단이 눈에 띄면 서양인들을 죽였는데 서태후는 이를 이용하기로 합니다. 서양인들만 없다면 해결되리라 생각한 것이죠. 의화단을 열렬히 지지했으나 영국을 비롯한 8개국의 연합군이 의화단을 싹 쓸어버립니다.

서태후는 광서제를 데리고 피난을 떠납니다. 그 와중에 광서제가 제일 사랑하는 진비를 우물에 빠뜨려 죽게하는 엽기를 보여주는 서태후. 연합군과 불평등 조약을 맺은 후 자금성으로 복귀해 다시 권력을 잡습니다.

서태후가 죽기 전날 10년동안 유폐되었던 광서제는 독살을 당하고 다음 황제로 광서제의 이복동생의 어린아들 푸이가 황제가 됩니다. 푸이는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로 황제가 된 다음날 74세의 나이로 서태후는 사망합니다. 그리고 청나라는 서태후가 죽은지 4년째 되던 해에 신해혁명으로 멸망하게 됩니다.

Leave a Comment